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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저지 살림남 이야기

전업주부의 연봉은 얼마인가?

전업주부 생활을 시작한지 두 달.

전업주부를 시작한 첫 달의 상당부분은 회사 휴가와 겹쳐놔서 월급이 꽤나 나왔다. 하지만 두 번째 달이 되니 월급날이 되면 통장에 의례 찍혀나오던 '급여' 한 줄이 찍히질 않는다. 아뿔싸, 정말 한 푼도 못벌었구나.

대학 입학 이후, 한 번도 돈벌이를 쉬어본적이 없었다. 대학시절 내내 과외를 끊어본적 없고, 군대에서 조차도 (고작 만원도 안됐지만) 월급을 받았으니 돈벌이를 쉬진 않았다. 심지어 자대배치 이후에는 다시 과외를 재개해서 군생활 마저도 풍족하게 지냈었다. 그러던 나였는데, 마침내 처음으로 통장에 꼬박꼬박 찍어오던 수입 항목이 사라진 것이다!

예상하지 못한 일은 아니니 충격적일 것은 없지만, 그래도 서운한 건 어쩔 수 없더라. 

마흔이 넘어가면서 직장에서 친하게 지내던 선배님들의 은퇴를 보기 시작했다. 물론 그 전에도 회사에서 은퇴하는 분들은 끊임없이 있었지만, 나랑 친하게 지낸 분들이 아니니 나에겐 딴세상 얘기였다. 하지만, 친하게 지내던 분들이 은퇴를 시작하는건 느낌이 달랐다. 나도 20년만 있으면 은퇴를 하겠구나, 하는 생각. 그리고 은퇴하는 분들은 여러가지도 아니고 딱 둘로 구분된다. 준비된 은퇴자 vs. 준비 안된 은퇴자. 

누구나 생각하겠지만 은퇴 준비라는 것의 대부분은 돈이다. 돈 없이 살수는 없으니까. 직장생활은 월급쟁이에게 안락함을 선사한다. 물론 회사라는게 주는 스트레스가 있긴 하지만, 월급쟁이는 회사에 나가서 업무시간을 버티고 돌아오면 약속된 월급을 꼬박꼬박 받고, 그 돈으로 가족을 부양하고, 친구들과 술도 마시고, 세상을 살아간다. 월급은 마약과도 같아서 한번 맛을 들이면 끊을 수가 없다. 준비된 은퇴자는 그 월급이 언젠가 끝날걸 알고 다른 수입원을 확보한 사람이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대부분의 준비 안된 은퇴자는 한달에 한 번 투약되는 마약의 달콤함에 빠져 아무것도 안하다가 은퇴와 동시에 금단현상에 시달릴 수 밖에 없게 된다.

전업주부를 하는 것이 좋은 선택일까를 고민하면서 금전적인 문제를 빼놓지 않을 수 없었다. 전업주부를 하는 동안은 월급을 못 받을텐데 어떻하지? 모아놓은 은퇴자금은 커녕 집도 없는 주제에 전업주부 해도 되나? 은퇴는 그렇다 치고, 전업주부 하는 동안 돈을 못 벌면 의기소침해지지 않을까? 기분은 그렇다치고, 지금껏 맞벌이 하면서 풍족하게 써대며 살아왔는데, 외벌이 생활이 가능하기는 할까? 그것도 나보다 적게 버는 아내 월급만으로 살아야하는데...




그런데 마침 그때가 내가 월급 말고도 다른 소득을 창출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작년에 출판한 금융공학 책이 몇 개 대학에 교재로 채택되면서 많지는 않지만 인세가 들어오기 시작했다. 책을 출판했더니 학원이며 대학가에 출강 기회가 생겨 강의료 수입도 생겼다. '그래, 이번 기회가 월급 마약 중독에서 미리 탈출할 수 있는 예방주사가 될거야!' 그래서 선택한 전업주부의 길이다. 그리고 이번 기회를 통해 준비된 은퇴자로 거듭나리라 마음도 먹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상 월급이 끊기고나니 서운한건 어쩔 수 없다.

그럼 전업주부는 진짜로 연봉이 0인가? 셀프 위안거리를 만들겸 전업주부의 연봉을 계산해본다. 이 동네에서 내니라고 부르는 아이돌보미를 주간에 부르면 한달에 $3,000은 줘야한다. 1년이면 $36,000, 한국돈으로 약 4,300만원. 하지만 내니는 딱 애들만 보는 사람이고, 나는 집안일도 한다. 가사도우미를 부르면 하루에 $100을 준단다. 나는 가사도우미만큼 집안일을 잘 하지는 못하니까 $50만 책정한다. 월급쟁이 생활을 할 때도 주말엔 집안일을 같이 했으니 주말 일당은 제외하고, 1년 252일을 치면 (금융공학자는 대게 1년을 252일로 친다) 이 연봉은 약 1,500만원. 합쳐보면 5,800만원이 지금 내 연봉이다. 물론 진짜 돈으로 받을 수 없는, 재무용어를 빌면 무형자산(intangible asset)이다. 

무형자산은 물체의 형태로 존재하지는 않지만 그 가치가 실질적으로 인정되는 자산을 얘기한다. 기업의 특허권, 상표권 같은 것들이 그 예이다. 스타트업 기업의 가치를 평가할 때는 똘똘한 핵심 인재도 무형자산으로 쳐주는 경우도 있다. 집안에서는 아이들 잘 돌보고 살림 잘하는 주부가 무형자산이다. 그리고 무형자산에는 유형자산과 마찬가지로 가치를 평가하고 재무제표, 즉 기업가치에 반영해준다. 그러니까 연봉이 0인 전업주부도 무형자산으로서 그 가치를 인정받아야하고 한 집의 기업가치에 인정함이 마땅하다. 그러니까 내가 실제로 벌지는 못하지만 위에서 계산한 5800만원이 내 연봉이라고 인정되어야 한다는 말이다. 이 정도면 한국경제에서 분석한 2018년 연봉에서 9분위에 속한다. 내가 받던 연봉의 반에도 못미치지만, 그래도 연봉이 0원이 아니고 5800만원이라니 마음이 따땃해진다. ㅎㅎㅎ


여기까진 좋은데, 그러면 내 연봉 5800만원은 누구한테 인정받지? 기업의 무형자산은 제3자가 인정하는 객관적인 자산이지만, 내 연봉 5800만원은 내가 생각하는 내 노동의 가치일 뿐이다. 아내가 벌어온 월급에서 5800만원이 내 몫이다라고 주장할 수는 있지만, 내부에서 돈이 순환하는걸 이중으로 계산하는건 집안 전체로 볼 때 수입을 이중으로 처리하는 분식회계가 되어버리니 그럴 순 없다.

그래, 인정할건 인정하자. 나는 5800만원 가치의 노동을 하는, 수입 0원인 전업주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