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뉴저지 살림남 이야기

옷이 날개라더니...

전업주부 생활을 시작한지 한 달, 옷의 의미를 새로 부여한다.

여의도 증권가에서 생활할 때 회사는 나에게 정장을 기대했지만, 나는 티셔츠와 면바지를 즐겨 입었다. 흔히 비즈니스 캐주얼이라고 부르는 그런 복장이다. 그러면서 생각했다, 수트를 쫙 빼입고 다녀야만 하는 직장인은 뭔가 남에게 잘보여야만 하는 직업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그리고 양복을 쫙 빼입은 증권맨들 사이에서 헐렁하게 다니는 내 모습은 굳이 남한테 잘 보일 필요 없는 여유로움의 상징이라는 우월감도 느끼곤 했다. 

그러다보니 내 옷장 속에 들어있는 비싼 수트들은 바깥 바람을 쐬기가 하늘의 별따기다. 특별한 이벤트가 있는 날에만 정장을 입다보니 그 비싸다는 Zenga 정장도 구매한지 몇 년이 지났지만 채 열 번도 안입은것 같다. 그러면서 내 옷장은 점점 비즈니스 캐주얼로만 채워지고 있었다.


전업주부가 되니 이젠 비즈니스 캐주얼 조차도 입을 일이 없다. 낮에는 회사에서 체육대회때 나눠준 아이다스 츄리닝 두 벌이 유니폼이다. 파자마를 입자니 분리수거 하러 나가거나 누가 초인종을 누를 때 처럼 잠깐잠깐 나갈 때 갈아입기 귀찮고, 청바지나 면바지를 입자니 쓸데없이 불편하게 있는 것 같아서 괜히 억울해서 츄리닝 차림으로 지낸다.

엇그제도 파란색 아디다스 삼선 츄리닝을 입고 집에서 뒹굴거리는데, 우리 막내가 물었다.

막내 : 아빠, 왜 백수들은 파란색에 줄이 세 개 있는 츄리닝을 입어요?

나 : (헉-!) ... ;;;

막내 : 아빠가 백수라는게 아니라, 개콘에서도 그랬고 유튜브를 봐도 백수들은 파란색 아디다스 츄리닝을 많이 입잖아요.

태고적부터 의복은 인간의 몸을 보호하는 수단일 뿐 아니라 인간의 사회적 지위를 나타내는 상징이었는데, 내가 백수의 상징을 입고 있었구나! 이제 옷을 빼입고다닐 일이 없으니 집에서 추리하게 입으면 계속 추리하게 입는거다. 그리고 사람들은 그런 모습만 보겠지? 

휴가를 즐기던 평일날, 동네 은행에 통장을 개설하러 갔다가 텔러가 내 신분을 꼬치꼬치 물어서 불쾌했던 기억이 있다. 회사 이름을 들어도 모르겠으니 신분을 확실히 하고서 통장을 개설해주려는 시장통 텔러의 직업의식은, 주로 금융맨들을 상대하기에 회사 이름만 얘기하면 더 이상 확인할 필요가 없는 여의도 텔러와 많이 달랐던거다. 그렇다, 타인은 내가 누구인지 궁금해하기 보다 어디에서 뭘 하는지에 더 관심을 갖는다. 그리고 옷은 이를 나타내는 무언의 상징이기도 하고.

살림남 생활을 시작하니 내 옷의 대부분인 정장과 비즈니스 캐쥬얼이 계속 옷장속에 쳐박혀있다. 괜시리 옷을 빼입는것도 억울하지만, 사놓은 옷을 입지 않고 옷장 속에 모셔놓기만 하는 것 또한 억울하지 않을 수 없다. 내가 저것들을 사느라 얼마를 쳐들였는데. 본전 생각이 나서 애들 픽업 갈 때라도 얘들을 좀 꺼내입어야겠다. 

물론 그렇다고 애들 데리러 가면서 수트를 입고 가는 멍청한 짓은 하진 않겠지만.